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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사진의 새로운 스타일

김영태 / 사진문화비평, 현대사진포럼대표

다큐멘터리사진은 1929년에 발생한 미국의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피폐해진 미국농촌의 현실을 기록하고자 미국농업안정국 FSA에서 사진가들을 고용한 FSA 다큐멘터리사진프로젝트가 출발점이다. 또 저널리즘사진은 1920년에 독일에서 망판인쇄술이 개발되어 사진과 문자가 어우러진 고속인쇄가 가능해지고 소형카메라가 개발되어 스냅촬영이 일반화되면서 기본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후1936년에 LIFE지가 창간되면서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고, 1950년대까지는 사진의 대명사가 다큐멘터리사진 이였다. 그 후 1950년대에 텔레비전이 대중화되면서 사진의 저널리즘적인 기능이 영상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영상언어의 사유화가 심화되었다.

 

대표예가 로버트 프랭크의 퍼스널다큐멘터리사진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사진과 저널리즘사진은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F S A 다큐멘터리사진이후 다큐멘터리사진은 1950년대 후반부터 특별하고 공적인 사건보다는 일상에서 발생한 사적인 사건과 특정한 장면을 기록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개별 사진가의 세계관을 드러냈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이다. 또한 개인전이나 개인 작품집발간이 주된 발표형태다. 그와는 다르게 저널리즘사진은 뉴스적인 가치가 있는 사건이나 장면을 주로 다루었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사진가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최종편집단계에서는 편집자의 시각이 사진의 주제 및 내용에 큰 영향을 끼친다. 저널리즘사진은 주된 발표무대가 공적인 매체다. 특히 이러한 차이점은 1950년대 후반부터 주관적인 시각을 표현을 하는 사진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최근 30여 년 동안 빠르게 변모하고 있는 동시대사진의 지형 속에서는 다큐멘터리사진과 예술사진의 미학적 지향점과 표현스타일도 경계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예술사진도 과거 모더니즘시대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찬양하고 조형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사진가의 사회적인 시각이 드러나고 있고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은 특정한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견해를 알레고리적으로 표상한다.

이번에 <체르노빌 ㅡ 쇠잔한 아름다움>이라는 표제로 개인전을 개최한 사진가 정성태의 작업도 이러한 미학적인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작가는 1986년에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된 체르노빌의 특정한 지역을 기록했다. 그곳에는 사고 당시에 다른 지역으로 이주되었던 사람들 중 노인들이 다시 되돌아와서 살고 있는데 작가는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그들의 초상을 찍었다. 그뿐 아니라 그곳의 자연풍경도 재현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그 땅의 물을 마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이번에 작가가 전시하는 사진에서는 제한적이나마 그러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들의 표정에서 평화로움이 느껴져서 인상적이다. 자연풍경도 너무나도 고요하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원전폭발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을 찍은 사진에서 당시의 처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작가가 찍은 초상사진은 얼핏 보면 사진이라기보다는 후기인상주의 초상화처럼 느껴진다. 프레임도 회화작업의 액자처럼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풍경사진은 프레임을 세 컷으로 분할하여 인화하였는데 전시공간과 효과적으로 어우러져서 보는 이의 시각을 압도했다. 전시작업 설치도 전시공간과 어우러지게 설치하여 관객들이 여유 있게 작품을 관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전시작업의 프린트사이즈도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하다. 작업의 내용, 작업의 표면에서 드러나는 느낌, 공간과의 어우러짐 등에 따라서 작업의 사이즈를 다르게 정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사진과는 차별화된 지점이 발생한다.

정성태가 이번에 발표한 <Chernobyl- 쇠잔한 아름다움>시리즈는 다큐멘터리적인 사진과 풍경사진이 유효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다. 또한 작업의 내용은 다큐멘터리 적이지만 시각적으로는 예술사진과 유사하다. 이번전시는 이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업을 전시공간에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전시의 완성도를 뒷받침한다. 

작가의 사진은 다큐멘터리적인 내용을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시각적으로는 사실적이기 보다는 회화적이고 컬러가 감각적으로 보는 이의 시각을 현혹한다. 작업의 컬러, 유효적절한 사이즈, 효과적인 작업배치 등이 유효하게 어우러져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업과 전시를 보여주었다. 작업의 내용, 시각적인 느낌, 작품의 사이즈, 공간과 어우러지는 작업의 배치 등이 전시의 완성도를 뒷받침하는 유효한 요소로 작용하여 보는 이에게 미학적인 감흥을 제공하는 성과를 거뒀다.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재현하거나 알레고리적인 수사법을 선택했다.

<Chernobyl- 쇠잔한 아름다움>시리즈는 원전폭발로 인하여 생명이 사라진 공간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의 다름 아니다.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공간이지만 작가가 전시한 작업에서는 원전 폭발 당시의 흔적,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 자연환경 등이 작가의 작업에 내재되어 있다. 또한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 남아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 혹은 내면적인 심리가 짐작되는 결과물도 있다. 그런데 작가가 이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평이라기보다는 중립적인 태도로 현실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중립과는 간극이 느껴진다.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기억, 미적인 주관 및 감각 등이 작용하여 주관적으로 현실을 재구성하였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사진과 예술사진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조형언어가 생산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성태가 이번에 발표한 작업은 어린 시절의 경험 및 사유에서 출발했다. 또한 작업의 내용이 이 시대의 화두와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원전의 위험과 두려움은 이제는 남의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현재 지진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서 원전폭발에 대한 우려가 공존하고 있다. 원전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위협적인가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미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 즉 우리의 현실을 다의적으로 일깨워주는 주는 결과물이다. 또한 자신의 경험 혹은 사유세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정성을 확보했다. 여러 측면에서 미학적으로 긍정적인 의미가 있는 전시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성태가 지속적으로 주목받고 역사에 등재되는 작가가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시점에서도 우리가 이 작가를 주목해야 하는 미학적인 정당성은 충분히 발견 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전시가 조명 받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전시다.

글: 김영태 / 사진문화비평, 현대사진포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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